2017-08-07
襄樊古隆中位于湖北省襄樊市襄阳以西约15公里的西山环拱之中。 古隆中是三国时期杰出政治家、军事家诸葛亮青年时代(17-27岁)隐居的地方。诸葛亮抱膝高吟躬耕陇亩长达10年之久。诸葛亮本是山东琅琊人,幼年失去了双亲,后随叔父至荆州,17岁叔父亡,来到襄阳隆中,躬耕苦读,留意世事,被称为“卧龙”。后来刘备三顾茅庐,诸葛亮全面分析了当时三分天下的局势,提出了一统天下的谋略,这就是著名的《隆中对》。
양양고융중(襄樊古隆中)은 호북성(湖北省) 양번시(襄樊市) 양양(襄樊市)의 서쪽 15킬로되는 서산을 둘러싼 곳에 위치하여 있다. 고융중은 삼국시기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인 제갈량이 청년시기(17-27세)에 은거하던 곳이다. 제갈량이 무릎을 깍지걸고 시를 읊으며(抱膝高吟) 궁경룽묘(躬耕陇亩)한지가 10여년이나 된다. 제갈량은 본적이 산동랑야(山东琅琊)로 어릴적에 양친을 잃어 삼촌을 따라 형주(荆州)로 갔다가 17세에 삼촌이 사망하여 양양융중(襄阳隆中)에 와서 궁경하며 열심히 공부하며 세상일에 관심을 가져 “와룡(卧龙)”이라 불리였다. 후에 유비(刘备)가 삼고초려(三顾茅庐)하자 제갈량이 그 당시의 삼분천하(三分天下) 국면을 분석하고 천하을 통일하는 책략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융중대(隆中对)>이다.
现在的古隆中是一个以诸葛亮故居为主体的风景名胜区,在鄂西北历史文化名城襄阳市与南漳、谷城交界处,总面积209平方公里。古隆中形成文物风景旅游区已有一千七百多年的历史,其地“山不高而秀雅;水不深而澄清;地不广而平坦;林不大而茂盛”,景区内群山环抱、松柏参天,景色颇为优美。主要景点诸葛草庐、武侯祠、古柏亭、抱膝亭、躬耕田、小虹古桥、六角井、观星台等。1994年经国务院审定列为国家4a级风景名胜区。
현재의 고융중(古隆中)은 제갈량의 옛집을 테마로 한 풍경명승지이며 악서북(鄂西北)의 역사적 문화유명도시인 양양시(襄阳市)와 남장(南漳), 곡성(谷城)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면적은 209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고융중이 문물풍경관광구를 형성한지도 이미 17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곳은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물은 깊지 않으나 깨끗하며, 땅은 넓지 않으나 평탄하며, 수림은 크지 않으나 무성하다. ( 山不高而秀雅,水不深而澄清,地不广而平坦,林不大而茂盛)” 관광구는 뭇산에 둘러쌓여 있고 송백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경치가 유난히 아름답다. 주요 명소로는 제갈초려(诸葛草庐), 무후사(武侯祠), 고백정(古柏亭), 포슬정(抱膝亭), 궁경전(躬耕田), 소홍고교(小虹古桥), 육각정(六角井), 관성대(观星台) 등이 있다. 1994년에 국무원의 심사를 거쳐 국가4a급 관광명승지로 선정되였다.
在后人心目中,诸葛亮不仅是智慧的化身,更是一代勤政廉洁的名相。因而,凡是他到过的地方,都纷纷为他立庙。各地的武侯祠就有七座。然而纪念地太多,就难以分辨真假。从古到今,谁是诸葛亮正宗纪念地而发生过不少争议。其中尤以湖北襄阳古隆中和河南南阳卧龙岗两地的武侯祠谁为“正宗”之争最为有名。 两地的武侯祠,历史都很悠久。隆中的建于晋代,保留着古朴的风貌;南阳的建于唐代,更显得宏大堂皇;两地都以诸葛亮的躬耕地自居,为武侯祠的正宗而争。为此,还打不少笔墨官司。
후세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제갈량은 지혜의 화신(化身)일뿐만 아니라 더우기는 청렴결백하고 성실한 명재상이다. 하여 그가 다녀온 곳마다 그를 위하여 묘를 세웠으며 각지의 무후사(武侯祠)만도 7곳이나 된다. 하지만 기념하는 곳이 너무나도 많아 그 진위를 구분하기 어렵다.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어느곳이 진짜 제갈량의 기념지인가에 대한 쟁론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중에서도 호북양양고융중(古隆中)과 하남남양와룡강() 이 두곳의 무후사가 어느곳이 “정통(正宗)”인가의 쟁론이 가장 유명하다. 이 두 무후사는 역사가 유구하며 융중(隆中)의것은 진대(晋代)에 건축되여 소박하고 옛스러운 풍모를 보존하고 있고 남양()의것은 당대(唐代)에 건축되여 더우기 웅장하고 위엄스럽다. 이 두곳은 모두 제갈량의 궁경지라고 자칭하며 자신네 무후사가 정통이라 다투고 있다. 이때문 수많은 필전과 송사를 벌여왔다.
三顾堂,建于清康熙五十九年(1720),是刘备三顾茅庐、诸葛亮隆中对策的纪念堂。其外泽清荷香,茂林修竹。传说,当年刘备三顾茅庐时拴马的古柏至今耸立门前。其内金匾银对,古碑林立,具有很高的历史研究和书法艺术研究价值。
삼고당(三顾堂)은 청강희(清康熙)59년(1720)에 지어졌으며 유비(刘备)가 삼고초려(三顾茅庐)하고 제갈량의 융중대책(隆中对策)하던 기념당(纪念堂)으로 늪이 깨끗하고 나무, 대나무가 우거진 곳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유비비(刘备)가 삼고초려(三顾茅庐)할시 말을 매어두었던 고백(古柏)이 지금까지도 문앞에 우뚝 솟아있다고 한다. 그안의 금편은대(金匾银对)와 즐비하게 늘어선 고비(古碑)들은 역사적 연구와 서예적 연구에 아주 큰 가치가 있다.
诸葛草庐----诸葛亮从17岁至27岁寓居隆中,草庐是诸葛亮日常会见宾朋的地方,刘备三顾茅庐,诸葛亮隆中对策就发生在这里。
제갈초려(诸葛草庐)—제갈량이 17세부터 27세까지 융중(隆中)에 은거할 시 초려(草庐)에서 제갈량이 일상생활에서 친구를 만나고 유비(刘备)가 삼고초려(三顾茅庐)하였고 제갈량 융중대책(隆中对策)도 이곳에서 발생하였다.
草庐亭建于清康熙年间,傍依明襄简王墓。此处本是草庐故址,明襄简王朱见淑仰慕隆中山水,于弘治二年(1489)毁草庐建陵墓。清康熙五十九年(1794),郧襄观察使赵宏恩为了纪念诸葛亮于草庐故址修建了此亭。 扇摇战月三分鼎;石黯阴云八阵图。 ——佚名摘赵宏恩诗句题草庐亭 作者简介:此联出自清康熙年间郧襄观察使赵宏恩所写的《隆中武侯草庐诗》。(注)扇摇:羽扇、纶巾是诸葛亮服饰特点,这里代指诸葛亮。战月:混战不息的年代。黯:不明,昏暗。《隆中武侯草庐诗》原文是:“汉季群奸探赤符,独吟梁父独扶孤。扇摇战月三分鼎,石黯阴云八阵图。泣鬼文成何有魏,陨星人去失吞吴。至今不泣英雄气,襄水缠绵晓夜呼。”
초려정(草庐亭)은 청강희년간(清康熙年间)에 지어졌으며 명양간왕묘(明襄简王墓) 근처에 위치하여 있다. 이곳은 원래 초려(草庐) 옛터였는데 명양간왕 주견숙(朱见淑)이 융중의 산수(山水)가 마음에 들어 홍치2년(弘治二年) (1489)에 초려(草庐)를 없애고 릉묘를 지었다. 청강희(清康熙)59년(1794)에 운양관찰사(郧襄观察使) 조굉은(赵宏恩)이 제갈량을 기념하기 위하여 초려의 옛터에 이 정각을 지었다